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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 프로야구를 빛낸 한국인 선수1: 장훈, 백인천

일본 프로야구를 빛낸 한국인

일본 프로야구는 1936년부터 시작해 제2차 세계대전을 제외하고 개최되었다. 긴 역사 만큼이나 기록도 풍성하고 스타선수도 넘쳐난다. 일본 프로야구를 빛낸 선수 중에는 재일교포 출신이 많으며, 한국 프로야구에서 활약한 뒤에 일본으로 옮긴 선수도 적지 않다. 우선 장훈과 백인천을 소개한다.

깨지지 않는 장훈의 기록

일본 프로야구를 빛낸 한국인 선수 중에 장훈은 신화같은 존재이다. 통산 3,085개 안타는 아직 깨지지 않고 있다. 500개 홈런 300개 도루, 16 시즌 타율 3할, 9년 연속 타율 3할도 깨지지 않는 기록이다. 수위타자 7번, 최고 출루율 9번의 기록도 가지고 있다. 장훈의 기록 중에 중요한 것만 나열한다.

장훈의기록
  • 통산 3085 안타, 일본 프로야구 최고 기록
  • 통산 500 홈런 300 도루, 일본 프로야구 최고 기록
  • 통산 3할 300 홈런 300 도루, 일본 프로야구 최고 기
  • 양대 리그에서 시즌 타율 3할5푼 이상, 일본 프로야구 최고 기록
  • 시즌 타율 3할 이상 16회, 일본 프로야구 기록

장훈, 거포 본능

1939년 히로시마에서 태어난 장훈은 1945년 피폭을 당했다. 초등학교 5학년 때 야구를 시작해 고교 시절 요미우리 자이언츠의 입단제안을 받을 정도로 실력이 뛰어났다. 그러나 부상으로 투수는 포기하는 대신 타자에 전념했다. 3학년 때에 고시엔 고교야구에 출전이 결정되었지만 학내 폭력문제로 장훈은 야구부에서 쫓겨났다.

장훈은 1959년 도에 플라이어스(현 홋카이도 닛폰햄)에 입단했다. 등번호는 10번. 프로야구 데뷔 경기는 한신 타이거즈와의 경기였다. 삼진에 수비 실수로 교체되었다. 다음날 2루타와 홈런을 날리며 첫해부터 주전을 꿰어찼다. 홈런 13개를 날려 신인왕에 뽑혔다.



이후 장훈은 거칠 것 없이 승승가도를 달리게 된다. 프로야구 2년째에 타율 3할을 넘겼으며, 3년째에 3할3푼을 기록했다. 4년째에는 홈런과 타점에서 리그 2위, 올스타대회에서는 MVP를 수상했다. 그해 장훈은 팀의 퍼시픽 리그 우승에 공헌해 MVP와 최고 출루율에 차지했다. 일본시리즈에서는 4번 타자로 출전해 4할이 넘는 타율로 우승에 기여했다.

요미우리 자이언츠로 이적

장훈은 장타와 도루가 가능하며 좌우 자유롭게 사용할 수 있는 최고의 선수였다. 1963년 홈런 33개에 도루 41개를 기록했으며, 1967년부터 1970년까지 수위타자를 차지했다. 1970년애 타율 .383, 홈런 34개, 타점 100개로 자기 최고기록을 세웠다. 이 타율은 16년 뒤인 1986년에 깨졌다.

1972년에 사상 7번째 2,000개 안타를 달성했다. 수위타자 통산 7번을 차지해 ‘안타 제조기’라는 별명을 얻었다. 1974년 팀은 닛폰햄에 넘어갔다. 몸값이 오른 장훈을 모셔가려는 구단이 늘어났다. 1975년에 요미우리 자이언츠의 나가시마 시게오 감독의 제안으로 요미우리 자이언츠로 이적했다. 프로야구 선수라면 누구나 요미우리 자이언츠에 가길 원한다.

이적 직후 장훈은 안타수 자기기록을 갱신하고 사상 두번째 2,500개 안타를 달성했다. 자이언츠에서도 장훈의 타격이 폭발했다. 자이언츠에는 4번 대만 출신의 오 사다하루가 있었다. 두 선수의 활약은 ‘OH거포’로 불렸다.

통산 3,085개 안타

1980년 장훈은 안타 3,000개 달성을 내세우며 롯데 오리온즈로 이적했다. 결국 그해 장훈은 일본 프로야구 사상 처음으로 안타 3,000개를 홈런으로 장식했다. 또한 사상 3번째 통산 홈런 500개도 달성하는 등 최고의 기록을 양산했다.

1981년 은퇴를 선언했다. 통산 타율은 7,000타석 이상에서는 역대 1위이다. 타격부문의 거의 모든 부문에서 상위에 이름을 올리고 있어 일본 프로야구 역사에서 최우수 선수로 꼽을 수 있다. 그중에서도 최다 안타기록은 아직 깨지지 않고 있다.

은퇴 이후 1982년부터 지상파 민방 TBS에서 야구 해설가가 되었다. 장훈은 롯데와 닛폰햄으로부터 감독 요청을 몇 번이나 받았지만, 조건이 맞지 않아 거절하거나 다른 사람을 추천했다. 이후 해설가로 활약했다.

야구의 풍운가, 백인천

극적 계약

한편 백인천은 일본 프로야구에서 활약한 뒤에 한국에서 선수생활을 마친 선수이다. 중국에서 태어나 해방과 동시에 귀국했다. 이후 고등학교에서 장타력을 인정받았다. 고교 졸업 후 농협에 입단했으며, 1962년 아시아야구대회에 출전한 뒤, 귀국하는 길에 도쿄에서 도에 플라이어스와 계약을 체결했다.

백인천은 3년째가 되서야 주전 포수자리를 차지할 수 있었다.4년째인 1965년 안타 116개, 홈런 14개를 쳤다. 이후 클린업에 기용되었으며, 수비도 포수에서 외야수로 옮겼다. 그러나 1970년 판정에 불만을 품고 심판과 싸워 퇴장을 당했다. 일본 프로야구에서는 처음으로 형사고발을 당했지만 화해가 성립했다. 그해 병역문제로 한때 귀국하기도 했다.

깨지지 않는 타율 4할

이후 백인천은 1972년 타율 .315로 리그 3위에 올랐으며, 홈런 19개를 쏘아 올렸다. 1975년 도에는 닛폰햄이 넘어가자 백인천은 태평양 라이온즈(현, 세이부 라이온즈)로 이적했다. 타율은 .319로 수위타자가 되었다. 1979년에는 롯데로 이적했는데 타율 .340로 자기 최고기록을 세웠다.

1982년에 한국에서 프로야구가 발족하자 MBC청룡에 선수 겸 감독으로 입단했다. 타율은 .412로 초대 수위타자가 되었다. 이 기록은 현재로 깨지지 않는 최고 타율이며, 한국 프로야구에서는 처음으로 4할 타자로 남아 있다. 첫해에 홈런도 19개를 쏘아 올렸다. 그런데 1983년에 간통죄로 체포되어 시즌 도중에 감독직을 내려 놓아야 했다. 삼미 수퍼스타즈로 이적한 뒤, 1984년에 은퇴했다. 이후 LG, 삼성, SK 등에서 감독과 코치 등을 역임했다.

결론: 프로야구를 빛낸 선수들

이상 일본 프로야구에서 장훈과 백인천의 활약을 간단하게 소개했다. 이외 한국인으로 일본 프로야구에서 활약한 선수로는 이승엽, 조성민, 이대호, 임창용, 오승환, 김태균, 김병현, 구대성, 선동열, 정민태, 박찬호, 이종범 등 많다. 다음에는 이중에서 몇 명 활약상을 다루도록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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